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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3 - 생각하는 나무 (호롱불)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4-04-23 17:08:58
  • 조회수 14

생각하는 나무 호롱불 전호림 글

 

가지런히 일직선으로 타오르던 호롱불의 허리가 휙 꺾였다. 펄쩍하고 방문이 열릴 때마다 호롱불은 그렇게 몸을 굽혔다가 다시 곤추세우곤 했다. 창이라야 여닫이도 못하게 막아버린 봉창 하나뿐 열십자로 얼기설기 질러놓은 투박한 창살 위에 닥나무 창호지가 발려져 있다. 문을 열면 밀폐된 방 공기가 급하게 빠지면서 압력 차에 의해 불이 춤을 추는 것이다.

어떨 때는 문을 여는 순간 오랑캐바람이 훅 밀고 들어와 호롱불을 꺼트리기도 한다. 그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허겁지겁 다왕(성냥)을찾는다. 사각통의 비사표 팔각통의 유엔성냥이 인기였다. 어둠 속에서 방바닥을 더듬더듬 저공 비행하는 손들. 그러다 스친 아버지의 손 그것은 흡사 알갱이 거친 뻬빠(사포)였다.

불이 꺼진 뒤에사 사람들은 어둠이 주는 긴장과 두려움을 안다. 그어진 성냥이 심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다시금 광명의 값어치를 고맙게 여긴다.

어서 불 꺼라 쓸대없이 기름(석유)을 왜 닳기노? 건넌방에서 할머니가 벌써 여러 번째 재촉을 한다. 불이 꺼지면 잠드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배가 고파서도 못 견딘다. 동지섣달 긴긴 밤의 시작이다. 코앞의 댓돌도 안보이는 밤 검정 크레용을 몇 백겹 칠해야 이런 밤이 될까 꼬맹이는 생각한다. 아랫목이 복숭아뼈가 눌어붙도록 자글자글 끓는다. 초저녁에 어머니가 긴 부지깽이로 고래 깊숙이 밀어 넣어 둔 등걸 덕택이다. 아직도 타고 있는 모양이다. 간혹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등걸 불은 청솔가지처럼 화력이 세진 않지만 은근하게 오래 간다.

실컷 잤다 싶었는데 아직도 한밤중인가 보다. 사위가 적막에 휩싸여있다. 동내가 통째로 깜깜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방이 뜨거운 데다 담배 연기까지 더해 목이 탄다 그때 화로 귀퉁이를 쨍쨍 두드리는 건너방 곰방대 소리가 났다. 윗목의 자리끼를 들이키는 순간 확 시장기가 밀려온다. 눈치를 챘는지 어머니가 부시럭 거리며 나가신다. 치맛자락에 한 움큼 찬바람을 묻혀서 돌아오는 손에 하얀 사발이 들려 있다. 동치미다. 입안에 침이 고이고 합창하듯 배가 꼬르륵 거린다. 이 빈한한 살림 어디에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동통한 무 하나가 사발 속에 떠 있다. 그 짱짱하게 여문 속살의 밀도를 와싹 깨문다 허기도 함께 씹힌다. 같이 순장 당한 푸른 무청이 청상과부처럼 서럽다.

갑자기 마당 한 편에 쌓아둔 짚볏가리를 쒸익하고 후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담벼락을 넘어온 오랑케바람이다. 힘을 주체못한 호풍(胡風)이 추녀 끝을 들쑤시며 빠져나가는 소리가 스산하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한촌의 밤 배고픈 산짐승이 내려왔는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다급하다.

뒷산 부엉이 춥다고 부엉부엉 울고

산판에 지친 아버지 뜨겁다고 빠드득 이빨을 갈고

처마 끝 씨옥수수 시린 이 덜덜 떠는데

잠 안오는 늙은 암소 뎅그렁뎅그렁 제 삶을 되새김질하네

모질고 긴 겨울은 그렇게 갔다.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부채꼴로 뺑돌아가며 누운 작은 온돌방에서 형제 자매간 우애가 새록새록 돋고 소견이 자라고 생각이 곰삭하다.

201212월 강릉시 왕산면 속칭 바람불이 마을이 마침내 호롱불을 끄고 전깃불을 밝혔다고 해서 잠시 그 시절을 회상해 봤다. 192912월 강릉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한 지 83년 만에 강릉 전역이 전기 혜택을 보게 됐단다. 거기서 멀지 않은 북녘땅 구석구석의 동포들도 하루빨리 그런 혜택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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