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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 - 생각하는 나무 (우매한 민족의 슬픈 미소)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4-04-24 10:52:35
  • 조회수 7

생각하는 나무 < 우매한 민족의 슬픈 미소 > 글쓴이 전 봉관

 

문학소년 야마모도 마사오(柳本正雄)1941년 진주만 공습이 있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국어(國語) 시간에 일본말 가나를 배웠고 도화(圖畫) 시간 첫 과제는 일장기 그리기였다.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진주만공습기념일)인 매월 8일은 학교에서 꽤 떨어진 언덕 위 신사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다녔다.

학교 정문을 지나면 독농가(篤農家) 니노미야의 동상이 있었다. 학생들은 등교 때마다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지나갔다.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어디에 있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를 했다. 운동장에서 열리는 조회 때는 제일 먼저 동쪽을 향해서 용성요배(宮城遙拜)를 했다. 그리고 황국시민(皇國市民)의 서사(誓詞맹세)를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19455학년이 되던 해에는 하루걸러 한 번씩 수업을 전폐하고 송근유(松根油)를 얻기 위해 송근 채취에 전일을 보냈다. 그해 여름방학이었다. 미국이 신형 폭탄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한 후에 상급생들이 총 동원되어 학교 측백나무 울타리 밖에 방공호를 팠다.

816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평소보다 늦게 조회가 열렸다. 단상에 오른 아마기(天城)교장은 전쟁이 끝났다. 이제 방공호 파기 같은 일은 안 해도 된다. 그러곤 나의 본래 성이 아마기가 아니라 조() 씨니 이제부터는 조 교장 선생님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일본의 패전 소식은 815일 정오 일본.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방송된 일왕의 육성방송 소위 옥음(玉音)방송 을 통해 알려졌다. <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4국에 공동선언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8.15일 종전 조서는 어느 곳에도 퍠전”“항복”“독립같은 명시된 단어는 없었다. ‘ 그것이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일왕이 수락하기로 한 ‘4국 공동선언즉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13)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일왕의 천연한 목소리와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 .. 등 몇몇 구절로 이제 전쟁이 끝났음을 어렴풋이 직감할 따름이었다.

해방 당일은 다들 어리둥절해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해방의 환희에 젖은 만세 인파가 본격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은 이튼날 오전부터였다. 16일 오전 10.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형무소에서 정치범 1000여 명이 석방되었다. 그에 앞서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패전 후 조선의 치안 유지를 제안했다.

 

16일 오후 여운형의 집 근처 휘문고보 교정에는 기억을 더듬어 서툴게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수천 군중이 모여 들었다. 단상에 오른 여운형은조선 민족 해방의 날이 왔다.’고 선언했다.

행방의 감격을 만끽하던 군중 사이에 소련군이 서울에 입성한다. ”는 소문이 퍼졌다. 소련군을 맞이하기 위한 시가 행렬이 서울역까지 이어졌다.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소련 언론사 특파원이었던 샤브쉬나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적었다.

 

학생들은 거대한 적색 천을 들고 다녔다. 거기에는 조선어와 러시아어로 위대한 소련군과 해방군에 감사한다. ”고 쓰여있었다.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문과 달리 소련군은 함경도 북부의 해안도로와 도시에서 패전한 일본군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쳐 고전 중으로 남하를 하는 데 시간을 놓쳤다. 미군이 남한에 입성한 사흘 후에야 일본의 패잔군과의 전투가 멎어 소련군은 계획대로 남한까지 오지 못하고 북한에 머무르게 된다.

일본은 패망했으나 조선의 치안과 행정은 여전히 총독부가 맡고 있었다. 816일 대구 청년 이일재는 예정대로 일본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훗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아직은 해방을 확신하지 못했던 때라 나는 일본 헌병대 사람을 따라 774부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들어간 지 이틀 뒤 아침 일본놈들이 모두 어디로 가고 없더라고요. 결국 징병되었던 사람들은 18일 모두 해산해 집으로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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