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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2 - 생각하는 나무 (아내의 병가)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4-04-23 18:12:13
  • 조회수 15

생각하는 나무 < 아내의 병가 > 전호림 산문

 

! 엄마가 쓰러져? ”

아빠 구급차 불렀어 빨리 와! ”

B씨는 딸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살 한번 걸리지 않았던 아내가 쓰러지다니 갑자기 1년 전 상처(喪妻)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쉰을 넘어도 미모를 자랑하던 친구의 아내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의 홀아비 생활을 보면서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 중 하나가 중년 상처(喪妻)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터였다.

자동차 키를 찾아들고서 B씨는 자신이 지금 달려갈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금요일 오후라 두어 시간 안에 끝내서 넘길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직도 출발하지 않은 아빠를 딸은 몹시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아내는 쓰러진게 아니라 넘어진 것이었다. ’

12번 흉추가 압박골절을 입어 30%가량 찌그러졌어요. 시멘트를 넣어서 뼈를 고정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가 휜다고 의사는 MRI 사진을 가리키며 겁을 줬다. 그의 아내는 극심한 고통을 진통제로 견디고 있었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그녀는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급히 시술을 마치고 급한 대로 통증이나마 사라져 주자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긴장했던 탓에 한 번도 즐기지 못했던 호사를 누리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아내는 병원 침대에 누워 여고 시절 파리한 얼굴의 급우를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체육 시간이면 교실에 홀로 남아 창밖에서 뛰노는 친구들 모습을 쳐다보기도 하고 종종 남자 선생님의 관심을 끌어내던 한 친구를 그녀 역시 못처럼 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관심뿐만 아니라 단단히 복수까지 하고 있었다. 원수 같은 아들놈은 삼수 끝에 겨우 변두리 대학에 들어가 놓고선 아직도 게임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딸은 유난히 긴 사춘기를 거치며 툭하면 패악을 부려 댄다. 남편은 보수적인 지방 출신답게 툭하면 윤리 도덕을 내세웠고 무엇보다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집안일을 돕는 일이 없었을뿐더러 왕왕 개념 없는 말들로 허파를 뒤집어 놓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의 깍듯한 시중을 24시간 3교대로 받으며 그녀는 행복한 금자 씨가 되어있었다. 일이 풀리려니 참 손아래 동서에 대한 서운한 반전도 기막힌 반전에 씻는 듯이 풀렸다. 운신을 못하게 되자 결국 설 차례를 동서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제사 음식 만드는데 손이 좀 많이 가는가? 내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생 좀 해봐라.

아니나 다를까 시집온 뒤 처음으로 연이틀 허리도 못 펴고 고생한 동서가 초죽음이 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아내의 웃음에서 깨소금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나 일어나면 외식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그럴 거야. 아내의 말에 B씨는 뜨금 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가 들었으니 마음 놓고 여행 한 번 못 갔던 마누라였다. B씨는 설 차례 뒤 가족회의를 열어 폭탄선언을 했다.

올해부터 모든 제사를 한 번으로 통합한다. 명절 차례도 추석은 없애고 설만 지낸다.

결단의 배경엔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낼 상황이 또 생기면 회사고 가정이고 풍비박산 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그녀로서는 시집온 지 28년 만에 받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결정 과정에 작은 저항이 있기는 했다. 평소 깐죽거리기로 유명한 시동생이 딴죽을 건 것이었다.

이건 형수의 음모야!”

네 엄마가 제사 안 지내려고 허리를 부러뜨렸다고요? 삼촌 혹시 좌빨 이세요? ”

정색을하고 대드는 조카의 순진한 대꾸에 온 가족의 폭소가 담장 밖에서까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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