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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무(예수를 만나고 싶은 욕심)-2018.07.03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8-07-03 15:47:32
  • 조회수 2253

생각하는 나무 예수를 만나고 싶은 욕심 김 수환 글

 

인생 공부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는 책을 보니 그 첫머리에 인생에 있어서 내가 배운 것은 오직 하나. 곧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곧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값진 삶을 풍부하게 해주며 구원해 주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날 내가 살던 방을 떠난다고 할 때 무엇인가 갖고 떠난다면 어느 것을 가지고 떠날까? 깊이 그리고 오래 생각해 본건 것은 아니지만 한결 같이 생각나는 것은 성경책 하나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 전축. 텔레비전존. 라디오 심지어 패물이라면 패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물론 이것을 가리켜 淸貧(청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청빈해서라기보다도 오히려 애착을 느낄 만큼 무엇과도 친숙해지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이것은 물건에 대해서만 아니고 사람에 대해서도 갖을지 모르겠습니다. 청빈은 사랑하면서도 끈을 수 있을 때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물건 같으면 애착을 느끼면서도 깨끗이 버릴 수 있을 때 청빈이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애착이나 사랑이 없어서 오는 담담함입니다.

 

그럼 성경은 왜 가져가고 싶으냐?

성경에는 어떤 애착이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생생한 만남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이 담긴 성경은 버릴 수 없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그분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습니다. 신학이란 학문으로가 아니라 생활한 체험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 깊이, 존재 속 깊이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삶도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에 한 달간 피정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온 예수회 신부님이 인사차 찾아 왔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피정 이야기가 나왔고 그 신부님은 일본의 어느 주교님과 한 달 피정을 같이 했다면서 은근히 나한테 권하는 투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한 달이 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심 깊이에는 주님을 곧바로 본다면 큰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 ... 그 신부님 표현에 의하면 한 달간 피정을 하면 믿음을 잃는다고 합니다. 주님을 보다시피 체험하는 것이므로 믿는 다는 말이 적합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 주님과의 만남을 한 편으로는 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생활과 존재에 너무 깊숙이 들어오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생명의 말씀을 지닌 주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하면서도 결국은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사도 베드로와 흡사합니다. 결국 나는 사랑하면서도 막상 사랑의 증거가 필요할 때에는 저버리는 약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대해서야 오죽 하겠습니까?

사람들 중에서도 사랑하기 곤란한 사람들 거지. 장애인. 천덕꾸러기. 등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참으로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로써 또는 체면상, 형식상, 사랑할 따름입니다. 그런 내가 사랑과 평화를 차별과 멸시와 미움, 다툼과 전쟁의 세상에 선포할 수 있습니까?

 

매일 점심 식사 후 한 시간씩 뒷산을 한 바퀴 도는 산책길에 나서곤 하였는데 하루는 때마침 눈이 내려 하얗게 덮인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예수를 아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혼자 산책하는 것을 보고 평소 잘 아는 마치 딸이 아버지 대하는 마음으로 가까웠던 한 수녀가 뒤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따라오는 줄 몰랐다가 산 중턱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는 그 수녀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기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왜 따라오는 거야? ’하고 꾸중하였습니다. 그때 내 얼굴이 아마 예수를 아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까맣게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수녀는 내 말을 받아서 그렇게 얼굴이 까매지도록 고민할 바에야 피정을 왜 하세요? 피정이 고민하는 것인가요? ’ 라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예수님을 알기 위해 반드시 고민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은총을 기다리는 것이어야 한다.> 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을 연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소망이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이 결여 된 입으로 만의 사랑입니다. 진실 된 사랑은 믿음이며 믿음은 마음에서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앞장에서 사랑은 고통을 함께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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