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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1 - 생각하는 나무 (가을 하늘)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4-04-23 18:20:54
  • 조회수 198

생각하는 나무 < 가을 하늘 > 김윤덕 글

 

며느리들 눈총에 전쟁 같은 명절 치르고 고향에 돌아오니 태풍으로 결딴난 참깨밭. 고구마밭이 주인을 기다린다. 어미라고 천날만날 무쇠 몸이더냐.. .. 가을 하늘만 야속하다.

 

남편 보내고 삼년째 서울 큰아들네로 역귀성하는 미자씨는 전쟁 같은 명절을 치르고 귀환한다. 둘째 며느리 애가 성균관인가 의금부에서 전() 금지령을 내렸다고 협박하거나 말거나 생전 남편이 즐기던 육전. 고추전에 깨송편까지 악착같이 빚어서는 한 상 거룩하게 차린 뒤 바람처럼 내려온 길이다. 지가 박사면 다여? 전 굽기가 무섭게 볼때기가 미어터져라 집어 먹던 게 누군디. 송편도 솔잎까지 싹싹 흝어서 봉지봉지 싸가더라만.

띠띠띠띠. 차르륵! 4개의 숫자를 눌러 현관문이 단박에 열리자 미자씨 얼굴이 환해진다. 소학교만 나왔어도 숫자와 셈에 밝은 그녀다. 자식들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잔돈 10원까지 계산해 받아내는 걸 보면 아직 치매는 아닌 거다. 현관 앞에 쌓인 신문을 탁탁 털며 집으로 들어선다. 나흘을 굶겼다고 있는 힘 다해 어항을 뛰쳐나온 열대어 네댓마리가 장판에 사지를 처박고 말라붙었다. 내가 이래서 집을 비우면 안 돼야. 불쌍해서 어쩌누.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젖혀 퀴퀴한 공기를 몰아낸다. 베란다 넘어 단골 마장원과 정육점 놀이터 평상에 고추 널고 수다 떠는 얼굴들을 보니 반갑다. 콧구멍만 해도 내 집이 최고지 꽃대궐을 준대도 서울선 안 살지.

냉동실에 꽝꽝 얼려놓은 올갱이를 꺼낸다. 올갱이국이면 사족을 못 쓰는 막내가 내일 온다고 했다. 지 아버지 세상 뜨고 가족 모임엔 발길을 끊었더랬다. 결혼 소리 듣기 싫고. 진흙탕 개싸움인 정치판을 두고 시시비비하는 언니 오빠들도 진절머리 난다고 했다. 나이 서른에 변변한 직장 없이 알바로 떠도는 제 처지도 한심했겠지. 어울렁더울렁 무난하게 살면 될 것을 누굴 닮아 저리도 뾰족한고.

올갱이국 끓여 놓은 줄 알면 잔소리가 또 쏟아질 터였다. 만드는 법 알려 줬더니 차라리 사먹자며 혀를 내둘렀다. 손이 많이 가긴 했다. 오거리 시장까지 나가 올갱이를 사와서는 꺼먹물이 다 빠지도록 문질러 닦고 헹구기를 반복해야 한다. 손질한 올갱이를 된장 푼 물에 넣고 껍질째 삶은 뒤 바늘로 살만 쏙쏙 빼내야 하는데. 꼬다리에 붙은 똥을 떼지 않으면 국물맛이 쓰다. 올갱이살은 부침가루 굴려 달걀 물을 입혀두었다가 아욱 부추 대파를 넣고 찰찰 끓인 국물에 투척하면 꽃처럼 피어오른다. 처음엔 숟가락 깨작이며 의심하던 사위들도 한번 맛들인 뒤로는 올갱이 해장국집만 찾아다닌다고 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장손이다. 왜 새벽같이 내려가셨냐고 툴툴댄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명절에도 돌덩이 같은 책가방을 메고 나가던 손자였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과목이 얼마나 된다고 .. ... 잠 쫒는 각성제를 달고 산다고 며늘애는 한걱정을 했다. 실력 없는 선생일수록 우주의 풀리지 않는 난제 수준으로 시험을 내서 성적표 받고 자해하는 애들이 수두룩하단다. 망할 놈의 교육. 호박잎 찌고 강된장 지져 한 술 뜬다. 꿀맛이다. 서울 사람들처럼 딱딱한 빵 쪼가리를 입에 물고 사니 역병이 도는 거다.

TV를 켠다. 명절 내내 남의 나라 여왕 죽은 얘기만 하더니 이젠 대통령이 무슨 욕지거리를 했다고 시끌시끌하다. 문제는 욕이 아니라 국민 가슴에 뿌리내리지 못한 미더움의 두께인 것을. 곧 닥쳐올 추위에 서민들 등 따시고 배부르게만 해주면 그보다 더한 흉인들 대수겠는가. 우리는 언제쯤 백성의 안위를 제 영달보다 귀히 받드는 나랏님을 만날까.

그나저나 태풍에 고구마밭이 잠겨서 새벽 댓바람에 나서야 한다. 폭우로 참깨 농사가 반타작이더니 심으면 절로 크는 고구마마저 낭패라 1년 내 고쟁이에 황토물 들도록 농사지은 보람이 없다. 오남매가 번차로 거들어주면 훨씬 수월할 것을 때 되면 택배로 받아먹을 줄만 알지 허리 아프면 걷기 운동하세요~’ 하고 문자만 날리니 명랑방창한 하늘 아래 우라질 소리가 절로 난다. 제 에미는 천날만날 무쇠 팔로 사는 줄 알까.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편다. 어둠 속에서 가만가만 왼쪽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곳엔 두 개의 심장이 뛴다. 팔십년을 쉼 없이 뛰다 지쳐버린 심장과 그 대신 뛰어주라고 의사 양반이 달아준 박동기. 이 기계가 멈추면 이승과도 작별이겠지. 먼 나라 여왕의 장례를 융숭하게도 치러주더구먼. 날 위해서는 누가 울어주나. 마지막 날까지 흙과 씨름하다 구수한 서리태 콩밥 한 그릇. 물에 말아먹고 잠자듯 떠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거늘. 제삿밥을 올리든가 말든가. 평생 일만 하다 죽은 이 촌부는 노래 고은 한 마리 새 되어 우리 손주들 가는 길마다 날아다니며 눈동자처럼 지켜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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