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나무 [ 늘인국, 어머니의 마술 ] 전 호림 산문
뒤주 바닥을 더걱더걱 긁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푸념이 들려 온다. “ 아이고 참말로 희한하제 누가 퍼가는 것도 아니고 지난 장날 팔아 온(사온) 납작보리 닷 되가 벌써 다 떨어졌네? ”
보나마나 오늘 저녁은 ‘ 늘인국 ’이다. 늘 보리밥을 먹다가 보리쌀이 떨어지면 늘인국 즉 손국수를 해 먹었다. 어른 손 두 개가 굳게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미국 원조 밀가루 포대의 아가리가 부스럭 부스럭 열린다. 바소쿠리처럼 ㄱ자로 웅크려진 어머니 손으로 에누리 없이 두 움큼을 퍼낸다. 올록볼록 곰보자국 같은 게 나 있는 양은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반죽을 한다 어느 정도 점탄성(粘彈性)이 생겼다 싶으면 두리반 위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쓱싹쓱싹 밀어서 늘린다. 반죽이 들러붙지 말라고 중간중간 밀가루를 그것도 아껴가며 흩뿌린다. 조막만 한 밀가루 뭉치로 예닐곱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큰 두리반을 덮을 만치 넓게 펴내는 기술은 어머니만의 마술이었다. 그야말로 식구 수에 맞춰 억지로 양을 늘린 ‘ 늘린 국수 ’이었다.
그게 펴지고 얇아지는 동안 기다리는 배들은 더욱 등가죽에 붙었다. 이윽고 배불뚝이 부엌칼로 숭당숭당 썬 국수를 열손 가락으로 털털 털면서 김이 술술 오르는 무쇠솥에 넣는다.
말이 국수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온갖 나물이 국수 가락보다 훨씬 많았다. 애기호박에, 부추에, 때로는 담장 밑 호박잎도 함께 순장을 당했다. 얍실한 국수 가락이 쭈르륵 흡흡.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헛바람도 함께 불려 들어가 실제 먹는 양보다 훨씬 더 배를 불렸다. 그래도 늘인국은 보리쌀 함줌 던져 넣고 한 솥 가득 물과 나물로 끓인 풀대죽보다 훨씬 먹기 좋았다.
시간이 흘러 오늘 그 지겹던 손국수 물을 부어 식구 수대로 그릇을 늘린 늘인국이 다시 그립다. 하지만 인젠 먹을 수가 없다. 그 마술을 부리는 어머니가 이제는 안 계시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형제들이 모처럼 시골마당 감나무 아래 멍석을 깔았다. 우리가 도회로 떠난 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것을 지겟작대기로 두들겨 털어내고서야 제비 한 마리가 반갑다는 듯 마당에 배를 스치다시피 저공비행을 하더니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처마는 더러 부서졌고 세월과 함께 늙은 감나무도 숱이 듬성듬성했다. 늦게 난 조카아이 고추만한 감이 땡글땡글 달려 있었다. 뚫린 잎사귀 사이로 끝 간 데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수십 년 전 그 배고픈 시간과 똑같은 환경에 놓이자 뇌 속 기억들이 착각을 일으킨 것인지 모른다. ‘ 파블로프의 개 ’도 아니고 무슨 조화람?
결국 농사일로 팔다리 관절이 불편한 어머니를 보채서 늘인국을 끓이게 했다. 조선간장에 가는 파와 풋고추를 쫑쫑 다져 넣고 갓 짜낸 참기름을 부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우리는 ‘ 난닝구 ’ 바람에 입맛을 쪽쪽 다셔가며 조금이라도 더 떠넣으려고 바람 따위는 입속으로 따라 들어 오지 못하게 오물오물 씹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서울로 돌아온 지 2주일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임종을 못 지킨 불효자식이 된 것이다. 그날 어머니를 보채 얻어먹은 늘인국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사실 그날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동생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편 일찍 여읜 뒤 암담하고 막막한 시간을 시어머니 모시고 사 남매 키워 내느라 어머니는 ‘ 여자의 시간 ’을 갖지 못했다. 어린 동생들은 몰랐으나 나는 엄마가 빨리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늘 걱정했다. 저녁상만 차리면 몇 숟갈 들다 말고 속이 더부룩하다며 물러앉곤 했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나는 알았다. 늘 속이 안 좋았던 어머니가 실은 누구보다 잘 드신다는 것을 그렇게 자식들에게 한술이라도 더 먹이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물러앉은 어머니의 마음을 그때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정말 아둔한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