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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31 - 생각하는 나무 (늘인국, 어머니의 마술)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24-04-23 18:00:28
  • 조회수 79

생각하는 나무 [ 늘인국, 어머니의 마술 ] 전 호림 산문

 

뒤주 바닥을 더걱더걱 긁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푸념이 들려 온다. “ 아이고 참말로 희한하제 누가 퍼가는 것도 아니고 지난 장날 팔아 온(사온) 납작보리 닷 되가 벌써 다 떨어졌네? ”

보나마나 오늘 저녁은 늘인국 이다. 늘 보리밥을 먹다가 보리쌀이 떨어지면 늘인국 즉 손국수를 해 먹었다. 어른 손 두 개가 굳게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미국 원조 밀가루 포대의 아가리가 부스럭 부스럭 열린다. 바소쿠리처럼 ㄱ자로 웅크려진 어머니 손으로 에누리 없이 두 움큼을 퍼낸다. 올록볼록 곰보자국 같은 게 나 있는 양은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반죽을 한다 어느 정도 점탄성(粘彈性)이 생겼다 싶으면 두리반 위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쓱싹쓱싹 밀어서 늘린다. 반죽이 들러붙지 말라고 중간중간 밀가루를 그것도 아껴가며 흩뿌린다. 조막만 한 밀가루 뭉치로 예닐곱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큰 두리반을 덮을 만치 넓게 펴내는 기술은 어머니만의 마술이었다. 그야말로 식구 수에 맞춰 억지로 양을 늘린 늘린 국수 이었다.

 

그게 펴지고 얇아지는 동안 기다리는 배들은 더욱 등가죽에 붙었다. 이윽고 배불뚝이 부엌칼로 숭당숭당 썬 국수를 열손 가락으로 털털 털면서 김이 술술 오르는 무쇠솥에 넣는다.

 

말이 국수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온갖 나물이 국수 가락보다 훨씬 많았다. 애기호박에, 부추에, 때로는 담장 밑 호박잎도 함께 순장을 당했다. 얍실한 국수 가락이 쭈르륵 흡흡.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헛바람도 함께 불려 들어가 실제 먹는 양보다 훨씬 더 배를 불렸다. 그래도 늘인국은 보리쌀 함줌 던져 넣고 한 솥 가득 물과 나물로 끓인 풀대죽보다 훨씬 먹기 좋았다.

 

시간이 흘러 오늘 그 지겹던 손국수 물을 부어 식구 수대로 그릇을 늘린 늘인국이 다시 그립다. 하지만 인젠 먹을 수가 없다. 그 마술을 부리는 어머니가 이제는 안 계시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형제들이 모처럼 시골마당 감나무 아래 멍석을 깔았다. 우리가 도회로 떠난 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것을 지겟작대기로 두들겨 털어내고서야 제비 한 마리가 반갑다는 듯 마당에 배를 스치다시피 저공비행을 하더니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처마는 더러 부서졌고 세월과 함께 늙은 감나무도 숱이 듬성듬성했다. 늦게 난 조카아이 고추만한 감이 땡글땡글 달려 있었다. 뚫린 잎사귀 사이로 끝 간 데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수십 년 전 그 배고픈 시간과 똑같은 환경에 놓이자 뇌 속 기억들이 착각을 일으킨 것인지 모른다. ‘ 파블로프의 개 도 아니고 무슨 조화람?

 

결국 농사일로 팔다리 관절이 불편한 어머니를 보채서 늘인국을 끓이게 했다. 조선간장에 가는 파와 풋고추를 쫑쫑 다져 넣고 갓 짜낸 참기름을 부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우리는 난닝구 바람에 입맛을 쪽쪽 다셔가며 조금이라도 더 떠넣으려고 바람 따위는 입속으로 따라 들어 오지 못하게 오물오물 씹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서울로 돌아온 지 2주일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임종을 못 지킨 불효자식이 된 것이다. 그날 어머니를 보채 얻어먹은 늘인국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사실 그날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동생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편 일찍 여읜 뒤 암담하고 막막한 시간을 시어머니 모시고 사 남매 키워 내느라 어머니는 여자의 시간 을 갖지 못했다. 어린 동생들은 몰랐으나 나는 엄마가 빨리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늘 걱정했다. 저녁상만 차리면 몇 숟갈 들다 말고 속이 더부룩하다며 물러앉곤 했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나는 알았다. 늘 속이 안 좋았던 어머니가 실은 누구보다 잘 드신다는 것을 그렇게 자식들에게 한술이라도 더 먹이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물러앉은 어머니의 마음을 그때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정말 아둔한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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