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나무 [ 북한산 자락에서 겪은 한밤의 시간 여행 ] 전호림 저
낮 동안 아직 볕이 따갑다. 그렇다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자기에는 너무 서늘하다. 책장을 넘기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열린 창을 타고 넘어온. 쏴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북한 자락에 바짝 붙어 있는 집이라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수직으로 내리꽂힌 비가 무성한 활엽수 잎과 부딪쳐 합창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창외삼 경우(窓外三庚雨).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이라는 최치원의 시구가 불쑥 떠올랐다. 시곗바늘은 새로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미 삼경을 지난 시각, 잠도 덜 깬 부스스한 머릿속에 왜 하필 그 시가 생각났을까? 천여 년의 시차를 뛰어넘어서
도심 광화문에서 불과 8km 남짓 떨어져 있을 뿐인데 이곳은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호젓하다 못해 별천지 같다. 잠이 말끔히 달아나 바깥으로 나왔다. 비는 멋어 있었다. 대신 풀벌레 소리가 하얀 달빛 아래 청아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을 닫고 살아선지 숲 가까이 살면서도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다. 찌르륵찌르륵 찌찌찌스스스... ....
갑짝이 마음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감당 못 하리 만치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풀벌레 소리는 순식간에 나를 싣고 먼 과거의 어느 지점에 내려 줬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다. 쭈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고 윗동네로 술 심부름을 가는 꼬마가 보인다. 이윽고 제법 무거워 보이는 술 주전자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길은 어둠속에 까맣게 묻혔다. 걸음이 더욱 빨라 진다. 그러자 주전자 주둥이로 출렁출렁 술이 새 나온다. 쏟지 않으려고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걷는 꼬맹이. 길 오른쪽은 산기슭. 왼쪽은 드넓은 콩밭이다. 콩밭 가운데 여기저기 서 있는 키 큰 수숫대가 도깨비처럼 서걱서걱 일렁인다. 무섬증에 머리가쭈뼛선다.
그때다. 풀벌레 소리가 합창처럼 요란하게 들려온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는 듯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듯이. 그때까지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 것이다. 꼬맹이는 풀벌레 소리를 길동무 삼아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사랑채 앞에 당도했다.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창호의 격자가 훤하게 드러나 있다. 물살 사이로 어른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댓돌 앞에서 휴.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선 아뢴다. “ 아버지 심부름 다녀왔습니다.”
수십 년도 더 묵은 기억이 이 야심한 시각 풀벌레들의 하모니를 들으며 선연하게 깨어난 것이다. 풀숲이 내 뿜는 약간 메마른 듯한 가을 냄새까지 그 옛날과 똑같다.
최치원도 창밖 빗소리에 설핏 든 잠이 깼을까? 비가 멎어 방문을 열고 댓돌로 내려선 최치원의 귀에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을 것이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소년 최치원. 이 시를 쓴 것은 스무 살 전후다. 아직도 여린 가슴의 청년이었다. 그도 필경 신라의 달밤 그 풀벌레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터. 이 시의 첫 구가 가을바람에 괴로움이 읊나니 왜 외로이 가 아니고 괴로이 였을까? 외로움이 쌓여 향수병이 되고 그것이 깊어져 그때쯤 고통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립다고 한달음에 돌아갈 수도 없는 고국. 등잔불 앞에서 홀로 덩그러니 맞는 쓸쓸한 이국의 밤들 그 사무치고 괴로운 마음이 그날 밤 어버이가 계시는 만 리 길 고향을 향해 달렸을 법하다.
옛날엔 12시간씩 걸리던 고향길을 요즘은 그 절반도 안 걸려서 간다. 없이 살던 때처럼 돈이 없어서 부모님 뵐 낯이 없어서 못 가는 것도 아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도달하는 물리적 거리의 함수 관계만은 아니다.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돌아가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치맛자락에서 떡을 꺼내 쥐여 주던 도암댁 아지매. 옛이야기를 구수하게 해주던 연지댁 할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라진 풍광에 대한 애틋함이다. 고향은 마음속 깊이 갈무리해 두고.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조금씩 꺼내서 음미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어머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