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들의 보금자리 명진들꽃사랑마을

명진소식

  • HOME
  • 우리들의 이야기
  • 명진소식
생각하는 나무(역사의 땅)-2018.09.04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8-10-04 14:30:58
  • 조회수 2160

생각하는 나무 < 역사의 땅 > 박 종인 글

 

조석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식혀 주는 참 좋은 아침에 소상공인들의 울부짖음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도심의 삶이 그리워 자연을 버리고 새 삶의 터전을 잡고 조금은 안정된 그리고 육체의 고통을 던 생의 질 향상에 모두의 로망이었던 도심 생활이 반세기를 누리지 못하고 허망한 꿈이 되어 버린 오늘을 바라보며 과거의 잘 못 된 역사의 길을 박 종인 선생의 논고를 지팡이 삼아 조심스럽게 걸어 보려고 합니다.

코스모스가 파아란 하늘에 구름을 모으고 예쁜 손짓으로 들판의 오곡을 유혹하는 계절의 모퉁이에서 사상도 이념도 무겁게 들고 고민하지 말고 내려놓고 어깨동무하고 동심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은. 그래서 예쁜 시간을 곱게 접어 추억의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생각 날 때마다 꺼내 보고 싶네요.

네 탓 내 탓 송곳처럼 아픈 잘못일랑. 도망치듯 여권도 없이 자취를 감춘 한여름 태양에 딸려보내고 우리 내 두둥실 새털 같은 구름에 마음 띄워 밝은 웃음 지을 날을 노래합니다.

 

" 나를 거스르지 말라 죽음 뿐이다. "

1482년 한가위 다음 날 성종의 첫 왕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는 죄목으로 폐비 된 여자였다. 처형을 집행하기 전 성종이 창덕궁 선정전에서 대신들에게 최종 의견을 물었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성종이 좌승지 이세좌에게 윤씨 집으로 가서 사사하라 명령했다. 이세좌가 내의 송흠에게 물으니 ' 비상이 가장 좋은 독약 '이라고 했다. 7품 당사관 권주가 비상을 가져왔다. 이세좌와 권주가 윤씨 집으로 가서 윤씨를 죽였다.(1482816일 성종실록)

승지 이세좌가 집으로 돌아와 부인 한산 조씨에게 일을 이야기 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했다. "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나, "

1504년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이날 등장한 인물들을 전원 처형했다. 비상을 추천한 송흠도 심부름꾼 권주도 죽였다. 산자는 조각내 주였고, 죽은 자는 관을 부수고 시체를 조각내 뼈를 갈아서 강에 날려 보냈다. (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 )

 

150452일 의금부가 죽은 이세좌 머리를 잘라 거리에 내 걸었다. 이세좌 집을 부수고 연 못으로 만들었다. 친 인척 집도 다 헐었다. 일주일 뒤 이세좌가 만든 법을 모두 폐지시켰다. 다섯 달 뒤인 1124일 이세좌가 뽑은 과거 합격생을 전원 탈락시켰다.

그 사이에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성씨와 엄씨를 때려 죽였다. 자기 손이 아니라

후궁 엄씨의 아들 이봉과 이항을 시켜 어미를 때려죽이게 했다.

세자 시절 배움을 게을리 하는 연산군을 매섭게 꾸짖었던 스승 조지서도 죽였다.

연산군이 이와 같이 잔인한 폭정을 하던 때었다. 조정에 원로대신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이 나를 가리켜 폭정을 한다고 할 것이다. "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 다들 자기 스스로 지은 죄의 값을 치르는데 누가 감히 성상께서 폭정을 하신다고 하겠습니까?"

1504~ 1506년 연산군일기 기록에 보면 조지서와 함께 어린 연산군을 가르쳤던 허침은 살아남았다. 조지서 처형을 결정할 때도 허침은 '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동의 했다.

( 한양대학교 맹 주성 교수의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보내는 1번 째 2 번 째 편지 ) 허침은 늘 퇴근하면 매양 피를 두어 되가량 토하며 분통해 하다 죽었다.( 김정국의 사채척언) 신하들은 대부분 입을 다물거나 왕에게 동조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좌. 윤 필상. 이파 3명에 엮여 처벌 된 자가 203명 이었고 나머지 30여명의 친족은 셀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언과 극론을 하는 선비는 사라지고 권력을 탐하는 아첨꾼과 간신배만 남았다.

 

연산군은 사냥과 유흥을 즐겼으며 월산대군의 처를 범하는 일이 있었으니 월산대군은 선종의 큰형이다 연산군의 큰 아버지 아닌가, 큰 어머니를 범하는 막장에 이르러 그의 죄과는 드러나고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남동생 무관 박원종이 누나 박씨에게 말했다. "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중종실록) 한 달 뒤 박씨가 죽었다. 누나가 죽고 40일 뒤 박원종이 동지 성희안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권력의 무상이란 영원한 권력자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돼 두 달 뒤 역질로 죽었다.

이 땅에 최고 권력자로서 폭권을 휘들렀지만 그가 남긴 것은 무덤하나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금표 하나뿐이다. 그의 살육과 보복의 정치 그리고 향락으로 버린 시간은 역사 속에 지저분하게 남아 후인들의 머릿속을 궁상스럽게 만들고 있다.

 

목록





이전글 생각하는 나무(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2018.08.28
다음글 생각하는 나무(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것)-2018.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