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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무(숨어있는 세계사-공명진 글)-2018.05.15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8-05-21 14:03:57
  • 조회수 4222

생각하는 나무 숨어 있는 세계사 공명진 글

 

숨어 있는 세계사를 읽고 느낌표를 나누고 싶어 접하는 분들의 다양한 思考(사고)와는 관계없이 막무가내고 폐달을 밟아봅니다.

최근 중국정부가 약 3억 명의 젊은이가 이용하는 유머 동영상 공유 에플리케이션() ‘ 네이한덴쯔 를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전격 폐지했다는 군요 .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전역에서 기습적이 차량시위를 벌렸다고 합니다.

얼마전 중국 신지핑 국가주석이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의 임기 제한을 철폐한 이후 중국 당국은 인터넷에서 신지핑 주석의 연임을 반대하는 각종단어를 차단하고 있다는 군요. 전문가들은 이번 동영상 폐쇄 사태도 중국정부가 비판여론을 감시하기 위해 사회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 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 )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통일했습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토지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한국전쟁 참전으로 내부 결속을 다져 공산당 지배를 확고히 했습니다.

자신감에 취한 마오쩌둥은 1956百花齊放(백화제방) 百家爭鳴(백가쟁명)을 표방하며 대중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특히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해 주었지만 지식인들은 선뜻 나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군요. 그러자 마오쩌둥은 말하는 자는 죄가 없으며 듣는 자는 반성해야 한다며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해 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공산당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뜻에서 민주당 파를 구성하게 됩니다. 교통부장관이었던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독재를 그만 두고 양당제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정치 체제로 바꾸자고 주장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주당파는 수십만 명의 정치조직으로 발전 했습니다.

 

쌍백운동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마오쩌둥을 살인마로 공산당을 무뢰한 독재로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19576월 공산당은 기관지 인민일보에 민주당파는 우파라고 하면서 이들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지요. 공산당의 반격은 이 사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문화정책인 쌍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자본가) 우파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 받은 것은 유명 여류작가 딩링이었다고 해요 딩링은 공산당에서 제명 되었고 이후 우파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노동교육을 강요 받았으며 도시에서 농촌으로 추방 되어 집단 농장에서 육체노동으로 교화를 받았답니다.

 

19587월까지 1년여에 걸쳐 지속 된 반우파 투쟁의 결과 공산당 고위간부와 당원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돼 당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원들과 공산주의 청년들은 우파가 전 인구의 5%쯤 된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따라 모든 조직에서 5%의 인원을 뽑아내 추방하는 일을 벌렸습니다. 그 결과 55만여 명이 우파로 낙인찍혀 공존 사회에서 내몰렸습니다.

당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공산당 비판에 나섰던 사람들은 反體制(반체제) 인사로 색출되는 유인책에 걸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덩샤오핑이 집권하는 1970년대 복권 될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安樂死(안락사)

104세의 生態學者(생태학자) 2018510일 스스로 생을 마칩니다.

그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해라.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삶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던 오스트라리아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고 안락사 지원 단체인 엑시트 인터네셜이 발혔다.

이날 정오 쯤 구달박사는 의료진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 안정제 주사를 맞고 운명했다.

주사액을 정맥 안으로 주입하는 밸브는 구달 박사 스스로 열었다.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녹취했다. “ 구달박사는 불치병이 아니라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최초의 사례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구달 박사는 6년 전부터 시력이 몰라보게 떨어졌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 추하게 늙는 것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

죽음을 위해 먼 길을 왔다고 소회하며 빙그레 웃음으로 주사제를 든 의사를 바라보며 스위스까지 왔군요.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묻자 베토벤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를 꼽았다. 그는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렸다. 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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