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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무(나폴리 민요)-2017.08.01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7-08-01 10:54:04
  • 조회수 2933

생각하는 나무 나폴리 민요 김 주영 글

 

고전 음악에서 바다에 관한 곡이 가장 많이 탄생한 곳을 꼽으라면 이탈리아 항구도시 나폴리를 들 수 있어요 오 솔레 미오 의 고향 나폴리. 나폴리 민요는 작곡가 미상의 자연 민요 가 아니라 그 지방 특색이 담긴 요소를 담아 작곡가들이 새로운 곡을 만든 창작 민요 에 속합니다. 나폴리 민요는 지역 음악 축제인 피에디그로타 제전에서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축제 기간에 이 지방 어부들이 성당에 있는 마리아 상을 위해 노래를 만들어 바친 것이 18세기 초부터 노래경연대회로 변했다고 합니다.

 

에두아르도 디 카푸아가 1898년에 작곡한 오 나의 태양( O S0le Mio )은 아마도 가장 유명한 나폴리 민요일 겁니다.. ’ 피에디그로타 음악제에 출품하려고 만든 곡인데 전형적인 나폴리 칸쵸네(노래) 스타일입니다. “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넌 더욱 찬란해 라는 노랫말은 나폴리 방언으로 썼습니다.

 

나폴리 민요 중에는 이곳 지명이 등장하는 노래가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돌아오라 소렌토로 입니다. 나폴리에서 작은 항만들을 지나면 베수비오 화산이 나타나고 건너편 언덕에 경치 좋은 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소렌토입니다.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가 1902년 피에디그로타 음악제에서 이 노래를 발표한 후 지금까지 줄 곧 사랑 받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나폴리 민요는 주로 테너 가수가 불렀는데 역시 이탈리아 성악가가 불러야 그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주세페 디 스테파노(1921 - 2008)는 나폴리 민요를 가장 전통적으로 해석 했습니다. 낙천적 정서와 정감 있는 나폴리 방언의 발음 등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페루치 오 탈리아비니(1913- 1995)와 프랑코 코렐리(1921 - 2003)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나폴리 민용의 참 맛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어 준 것은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 2007)였습니다. 시원시원하고 밝은 음색과 솔직한 감정 표현으로 언제 들어도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멋진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떠올리게 하는 명가수들 노래를 들으면 어느새 우리 눈앞에 넓은 바다가 펼쳐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 음식문화 탐방기

 

가장 오래되고 많이 찾는 외식인 중화요리에 관한 역사 이야기 골목길을 함께 걸어요.

중국집의 인기는 자장면 보다는 우동과 호떡이 대표적인 음식이었습니다. 1880 - 1920년대 화교 중화요리점은 주로 국내 거주 중국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대중화 시기는 해방 이후. 아주 늦게는 한국인 경영 및 주방장이 보편화한 1970년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교중화요리점은 1880년대 이미 서울에서 탄생했고 일제 강점기 이전 개항기에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중화요리점과 호떡집이 생겨났지만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의 대일 쌀 수출로 소득이 늘어난 조선인과 통치자인 일본인의 중화요리에 대한 수요가 중가했습니다.

또 조선인의 입맛에 맞을 뿐 아니라 하층민에서 상층민까지 만족할 수 있는 다양한 가격대의 중화요리가 생겨나면서 대중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193010월 실시한 국세조사 자료를 보면 전국의 화교 중화요리 음식점은 1635개소, 호떡집은 1139개소로 총 2774개소에 달했다고 문화일보에 기재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인 일본의 중화요리 음식점이 1388개로 조선의 2분의 1 수준이었던 것과 대비

됩니다. 19194월 서울 선린동 봉춘관 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가 모인 것처럼 중화요리점은 독립운동가나 문인들의 출판기념회 장소로 널리 이용됐습니다.

 

초기 대중화시기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메뉴는 우동과 호떡이었습니다.

원래 우동은 일본 음식으로 당시 중화요리점에서 판매한 우동은 호면(胡麵) 혹은 청국우동 으로 불렸습니다. 화교 진평순이라는 사람이 일본나가사키에서 개업한 중국요리점에서 1900년대 초 나가사키 짬뽕 을 개발했는데 이 음식이 처음에는 중국을 뜻했던 지나(支那)우동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아 청국우동 백짬뽕 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장면은 1936년 국내신문에 처음 등장했지만 대중화 된 것은 더 나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1936년 발행분에 보면 자장면이 선전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자장면은 1930년대 중화요리점에서 조선인 입맛에 밧도록 만들어 판매를 개시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몇 가지 음식 가격을 보면 우동(30). 양장피(80). 탕수육(55). 잡채(40) 등이 등장합니다. 호떡은 5전이라는 싼 가격 덕분에 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용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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