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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무(고랑포의 역사)-2017.04.25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7-05-22 13:52:38
  • 조회수 3280

생각하는 나무 고랑포의 역사 박 종인 강의

 

경기도 연천과 파주를 잇는 고랑포 나루에는 1500년 역사가 누적되어 있다.

고려 군사가 건넌 이 물결을 신라 경순왕은 끝내 건너지 못했다. 조선 14대 왕 선조는 이 물결을 통해 야반도주했다.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화성(火星)이 남쪽 하늘 궁수자리를 범했다. 전쟁이 터질 징조였다. 과연 임진왜란이 터졌다. 마흔 살에 접어든 사내 이연은 그달 많은 보고서를 받았고 많은 결재를 행했다. 이연은 조선왕조 14대 왕 선조(宣祖). “선조수정실록”4월 기록에보면

부산진 부사 정발과 송상현 戰死(전사) 경상좌수사 박홍 逃走(도주)일본군 밀양 침략 상주에서 이일 部隊(부대) 敗北(패배) 동지춘추부사 이덕형을 일본군에 사신으로 파견. 기성부원군 유홍이 경성에서 司直(사직)과 함께 죽자고 上書(상서). 충주에서 신립 戰死(전사). 충주 시민 慘殺(참살).

 

마지막 기록은 이렇다.

왕이 탄 가마가 모래내재를 넘었다. 임진강변 나루터로 가고 있다. 그달 30일 폭우가 쏟아지는 암흑 속에 선조 일행이 임진 나루에 도착했다. 179년 전 2월 태종이 세자와 함께 거북선이 모의 倭船(왜선)과 전투하는 훈련 상황을 구경하던 바로 그 나루터였다. 류성룡의 懲毖錄(징비록)에 따르면 나루터 행정청 인 丞廳(승청)을 불태워 겨우 어둠을 뚫고 강건너 동파역에 몸을 쉬었다.

 

文官(문관)이 대부분인 수행원 86명 가운데 내시가 24명 마구간 지기가 6명 심부름꾼 2명 허 준을 비롯해서 의사가 2명이다.

 

백성은 물론이고 병졸도 없이 왕 단신으로 국정을 버리고 야밤도주 한 것이다.

 

임진 나루 동북쪽 절벽에 花石亭(화석정)이 있다.

화석정에는 율곡 이이가 여덜살 EO 썼다는 八歲賦詩(팔세부시) 표석이 서있다. 파주 출신인 이이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

 

1500년 전 고랑포와 고구려

 

한반도 중간지대 동쪽은 산악이다. 소쪽평야지대는 임진강이 남과 북으로 가른다. 임진강에서 가장 폭이 좁고 얕은 곳이 바로 임진 나루와 고랑포다.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조선시대 의주대로는 임진나루를 지났다.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국경은 고랑포에서 결정됐다. 고구려가 평양에서 신라로 가는 최 첨단 코스가 개성 ~ 장단 ~ 고량포였다.

 

임진강을 쟁취한 고구려는 강변에 요새를 쌓았다. 이름은 호로고루( 瓠蘆古壘(호로고루)

임진강 옛 이름 호로강( 瓠蘆江)에서 따왔다. 임진강 유역을 정복한 고구려는 강변 산중에 20군데나 산성을 쌓았다.

신라가 고구려를 나. 당 연합군으로 멸망을 시키면서 임진강 변도 신라 땅이 되었다.

 

1000년 전 고랑포 그리고 경순왕릉

 

왕건에게 투항 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왕건 사위가 되었다. 고려 수도 개경에서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다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조상들 묻힌 亡國(망국)首都(수도)경주로 향하던 ()은 고량포를 건너지 못했다. 전하기로는 신라 遺民(유민)들 봉기를 우려한 고려의 왕실이 왕의 무덤은 首都(수도)에서 100리 밖에 두지 못한다. 고 운구를 멈추게 했다. 경순왕은 결국 고량포를 코앞에 두고 북쪽 언덕에 묻혔다.

 

고랑포와 두 許氏(허씨)

 

고랑포와 임진나루를 건너면 파주 진동면이 나온다. 민통선 이북 지역이다. 아름답던 동파리 해수욕장은 1990년대 일산 신도시 건설 때 다 파내서 사라졌다. 2003년에 동파리에 해마루촌이라는 정착 마을을 만들었다. 미리 역락하면 관광객도 받는 개방된 체험마을이다.

 

연천에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 있다. 조선 중기 문신겸 학자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1607 - 1689)에 반론을 제기한 정치가 미수 許穆(허목)<1595 - 1682>이 이곳 왕진면 강서리에 잠들어 있다.

 

송시열이 불치병에 걸렸을 때 백약이 무효라 결국 송시열은 아들을 시켜 의술에 정통한 政敵(정적)허목에게 처방을 받아 오게 했다. 독약을 줄것 라는 우려에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들이 가서 약방문을 받아 오니 과연 독극물인 砒霜(비상)이 있었다.

아들이 砒霜(비상)약을 빼고 약을 지으니 완쾌가 되지 않았다. 허목을 찾아가니 처방대로 砒霜(비상)을 다 쓰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결국 송시열은 허목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 완쾌 됐다.

적에게 목숨을 맡기고 그 적에게 생명을 줄 줄 아는 멋진 사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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