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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무(開川(개천)에서 龍(용)이 된 男子(남자))-2017.04.10
  • 글쓴이 관리자
  • 작성일 2017-05-22 13:50:49
  • 조회수 3093

생각하는 나무 開川(개천)에서 ()이 된 男子(남자) 심승구 지음

 

저잣거리에서 신발을 만들어 팔던 奴婢(노비)功臣(공신)으로 임명되고 17년간 포도대장의로 활약하며 도덕을 소탕한 波瀾萬丈(파란만장) 인생의 주인공은 경주 이씨 兩班家(양반가)의 지방군수 이종직과 그의 시중들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孽子(얼자. 천인 여성이 낳은 아들)이양생(1423- 1488)의 이야기입니다.

 

양생은 당시 ()대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奴婢(노비)가 되어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가죽신이 유행하자 양생은 가죽신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백정을 비롯한 다양한 下層民(하층민)과 어울려 생활을 했습니다. 백정들은 소나 말을 屠殺(도살)한 뒤 얻은 가죽으로 물품을 만들었고 양생은 활을 쏘고 말을 탔기 때문에 무예에도 능숙했습니다.

 

양생은 참판 윤보 집안의 여종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학자 聖賢(성현)은 그의 著述(저술) “ 庸才總和(용재총화)에서 양생부인의 외모에 대해 추하고 鄙陋(비루)하다고 描寫(묘사) 했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했음에도 양생은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 훗날 재상이 된 뒤 새 아내를 맞거나 첩을 드리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 했는데 부와 권력을 가졌다하여 아내를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발 장사를 하던 양생에게 婚姻(혼인)은 뜻밖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부인의 상전이던 윤보는 세조의 () 정희왕후의 조카였다. 수양대군(훗날 세조)1453癸酉靖難(계유정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측근과 武士(무사), 천인들까지 끌어모았다. 이때 정희왕후 윤씨 집안의 친인척이 대거 참여했고 양생도 수양대군의 侍從奴婢(시종노비) 중 한 명으로 가담하게 됩니다.

 

세조는 즉위 후 奴婢(노비) 軍隊(군대)인 장용대를 설치했습니다.

36세였던 양생은 무예시험을 거쳐 장용대에 합격했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에 참여 했다. 그는 적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으로 功臣(공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겸사복이라는 관직을 받아 왕의 옆에서 신변보호와 왕궁 호위를 맡게 됩니다.

용재총화에 보면 당시 호랑이의 출현으로 사람이 죽도 도둑이 민가를 해치는 일이 잦아 왕궁에서 골치아파 했는데 양생이 나서서 호랑이를 잡고 도둑을 잡는데 탁월하여 예종과 성종대에 걸쳐 근심한 호랑이와 도둑이 끊이지 않자 1470년 조정은 양생을 포도대장으로 임명했다. 양생은 경기. 강원. 황해. 일대의 약탈한 도적을 잡은 功勞(공로)로 정 3품 당산관으로 승진합니다.

 

1472년 관악산에 진을 친 악명 높은 강도를 잡아 종2품가선대부로 승진함으로써 드디어 宰相(재상)이 됩니다.

 

양생은 죽기 두 해 전까지 장장 17년간 포도대장을 지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금 수저와 흙 수저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진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삶의 진정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환경에 의해 삶을 포기하는 분들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양생이 노비로 태어난 것을 비관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살았다면 어떤 기회가 와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예를 연마했고 친구들을 통해 들은 정보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적극 활용했던 것입니다.

 

期會(기회)準備(준비) 된 사람이 所有(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美國(미국)() 文豪(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著書(저서) “ 老人(노인)과 바다 에서 어부 산티아고를 통해 希望(희망)이 없이 사는 것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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